근대의 초극이란 무엇인가?

 ‘근대의 초극(近代超克)’1942년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을 통해 본격적으로 논의된 개념으로, 서구 중심의 근대 문명을 비판하고 일본 고유의 사상과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철학적·사상적 시도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의 근대적 가치를 받아들이면서 경제적·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지만, 동시에 서구 열강과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이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에 돌입하면서 일본 지식인들은 "서구적 근대"를 초월한 새로운 사상적 질서를 모색하려 했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전쟁 수행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도 활용되었다. 본고에서는 근대의 초극논의의 주요 내용과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고, 전후 평가 및 한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근대의 초극 논의의 주요 내용

심포지엄의 개최와 목적

  19427,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이 모여 근대의 초극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 음악평론가 모로이 사부로, 물리학자 키쿠치 세이시 등이 참석하였으며, 그들은 일본이 세계를 주도할 새로운 사상적 원리를 정립해야 한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논의된 핵심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서구 근대 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며, 일본이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정치적 질서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사회 구조를 재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양 중심의 새로운 문명을 구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일본의 전쟁을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서구와 동양의 문명적 대결로 해석하며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서구 근대에 대한 비판

  참석자들은 서구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파괴하고 물질 중심의 사회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서구의 근대적 가치가 개별 국가의 자율성을 무너뜨리고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이어졌으며, 일본도 그 질서 속에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따라, 일본은 서구 문명과는 다른 형태의 정치·경제적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질서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자유보다는 공동체, 개인주의보다는 협동을 강조하는 사상이 근대의 초극 논의에서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적 가치의 강조와 협동주의

 ‘근대의 초극논의에서 일본의 천황제는 중요한 요소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사회 질서가 서구 민주주의보다 더 우수한 체제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논의가 아니라, 일본이 "동양적 가치"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적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와 함께, 서구적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협동주의(協同主義)"가 등장했다. 협동주의는 일본, 만주, 중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동아시아 협력체" 개념과 연결되었으며, 일본이 이 지역을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과적으로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변질되었다.

 전쟁과 사상적 정당화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근대의 초극논의는 일본의 전쟁을 문명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이 단순히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며 동양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문명 질서를 창출한다는 이상을 내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했으며, ‘근대의 초극논의 역시 이러한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근대의 초극 논의의 의의와 한계

  ‘근대의 초극논의는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 중심의 근대 문명을 비판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적 정체성을 정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 단순히 서구적 모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 가치와 일본의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전쟁과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면서 본래의 철학적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구 문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일본식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후 일본 지식인들은 근대의 초극논의가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는 점을 반성하였으며, 특히 철학자 타케우치 요시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근대의 초극"이 단순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전쟁과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논의였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의 초극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사상적 고민이 반영된 논의였으나, 결국 현실에서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일본이 패전하면서 그 의미도 퇴색하게 되었다. 전후에는 일본 사회에서 이 논의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고, 오늘날에는 당시 지식인들의 역할과 책임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