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 : 피해자-가해자 구도의 전복

 201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미투 운동''학교 폭력' 문제는 끊이지 않는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욱 폭발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해결되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다.

 2023년 교육부의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학생이 1.9%에 달하며, 이는 전년 대비 증가한 수치이다. 성폭력 역시 2023년 한 해에만 강간·강제추행 발생 건수가 22천 건을 넘어설 만큼 여전히 심각하다. 이처럼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억울한 피해자'로 포장하며 반격에 나서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진실 공방 속에서 릴리 출리아라키의 저서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가 이 현상를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어 우리 사회에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피해자 서사의 무기화가 작동하는 방식

 릴리 출리아라키는 이 책에서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적대감을 키우고 평화로운 공존을 가로막는 데 피해자 담론이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미투 운동: '마녀사냥' 프레임의 역공

 미투 운동은 권력 관계에서 약자였던 피해자들이 성폭력의 실체를 폭로하며 사회적 정의를 바로잡고자 한 흐름이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회적 명망가들 혹은 사회적 위치가 피해자들보다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된 '억울한 피해자'라는 서사를 구축하며 역공을 펼친다. 이들은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망가졌다",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음해다", “나도 당했다등과 같이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대중의 연민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전복은 주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확산된다. 가해자 측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이를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정당화한다. 결과적으로, 미투 운동의 본질인 '피해자의 고통'은 가해자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프레임에 갇혀버린다.

 학교 폭력: 가해자의 '힘든 성장 서사'

 학교 폭력 문제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이 "나도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와 같은 과거의 상처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출리아라키는 이 현상에 대해 "피해자의 위치는 도덕적 무적성을 부여하며, 이로 말미암아 어떤 행동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도덕적 허가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서사는 가해자의 폭력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되며, 대중은 '환경이 만든 불쌍한 아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이 때문에 정작 폭력의 상흔에 고통받는 진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가해자의 감정적 호소에 가려져 힘을 잃게 된다.



 전 세계적인 현상, 그리고 책임적 공감의 필요성

출리아라키가 제시한 '피해자 의식의 무기화'는 한국 사회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각종 법적 기소와 비판을 '정치적 박해'이자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며, 자신이야말로 '딥 스테이트'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피해자 서사를 통해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어냈고, 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이처럼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가해자들의 피해자 행세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출리아라키는 피해자 의식의 무기화에 대한 해법으로 '단순한 연민과 공감'이 아닌, '책임적 공감(responsible compassion)''정의의 재정립(reclaiming of justice)'을 제안한다.

피해자성 담론의 재정립: 저자는 모든 고통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고통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대신, 진정한 피해자의 고통을 식별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데에 피해자 담론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적 공감의 실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의 맥락과 가해-피해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려는 윤리적 태도가 필요하다. ,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실제로 어떤 권력 관계 속에 있는지 분석해야 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 궁극적으로 출리아라키는 정의를 개인의 감정적 해소 문제가 아닌,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다시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의 도구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피해자 담론이 특권층의 무기가 아닌 진정으로 취약한 이들을 위한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단순히 감정적 호소에 휩쓸리지 않고, 고통의 진정한 맥락과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살피는 '책임적 공감'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정의는 피해자 서사를 무기로 휘두르는 행태를 거부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